오필순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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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2,039회 작성일 : 15-02-26본문
•학 력 1903 ~ 1975
•주요경력
화성군 비봉면 삼화리에서 십대를 세거한 전형적인 세습국악집안이다
호적에는 오필순으로 되어있지만 사람들은 필선이라 부르며 본인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꺼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필순은 조부 오인학(?~1870)이 쌍줄을 타고 각종 악기를 다루는 것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집안의 후손답게 악기는 물론 재담이나 장고, 앉은 말 학습 등 빼어난 재주를 지녔던 불세출의 명수였다고 한다. 열두살에 남사당을 따라서 만주에 가서 그야말로 동가숙서가식 하다가 고향으로 귀향을 하여 본디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준 재주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 보이기 시작을 하였다.
오필순의 피리 시나위와 삼현, 해금 삼현, 시나위는 부친 오상집에게 학습을 하고 또한 만주에서 보고 들은 것과 그리고 본인이 만든 가락을 바탕으로 짰으며 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앉은 말 만큼은 역시 집안에 전하여 내려오는 문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하며 이 문서는 현재(2002년) 무업에 종사하는 아들 진수가 소장하고 있다가 한 책은 분실하고 다른 한 책은 필사본으로 다른 이가 가져가서 되돌려 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오필순의 피리 시나위는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데 가락을 수성질로 연주하지 않으면서도 가끔씩 연주하는 시나위의 멋은 구성지고 한유한 가락이었다고 한다. 장유순의 가락이 매우 도드라지면서도 길게 뻗는 것이 특징이라면 오필순의 가락은 단오관, 육관청, 네가락 빗청, 얼빗청을 주로 구사하기도 하였다. 장단을 달아놓고서 가면 그 가락은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걱정이 하나 없는 가락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혀 튀김”, “ 목튀김”은 가히 일품이고 장유순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었다고 한다.
오필순은 악기만 잘 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갈고 닦은 공력이어야만 나오는 성주풀이를 앉아서 풀면 구성지기도 하려니와 그 청승맞은 목구성은 무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며 집굿이든 도당굿이든 뒷전에서 하는 “으뎅이” 놀음을 하거나 “맹인 타령”을 하면 그야말로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정도로 기가 막혔다고 한다. 경기도의 남부 지역 특히 화성 아래 지역은 거의가 새벽에 성주를 풀어내는데 여자가 장고의 궁편만 피면서 성주의 신격인 “황우양”을 주워섬기는 무가를 말하며 뒤이어서 집 짓는 순서를 온갖 재미있는 사설로 엮어서 하는데 남자가 할 경우에는 판패개 소리로 하지만 여자가 할 경우에는 이처럼 궁편만 치면서 무가를 구송하는 게 다르다.
오필순의 음향 자료로는 작고하기 일년 전에 양감면 고(故)오경환의 집에서 한 재수굿에서 조카 사위인 고(故)이용우와 같이 연주한 시나위 연주 음향 테이프가 남아 있다.
표-2. 오필순의 가계도
①오인학─┬─ ②김씨
├───┬───┬───┬───┐
③상집─┬─④이도성
┌───────┬──────┬─┴─────┐
⑤창복─⑥신씨 ⑦은귀─⑧곽씨 ⑨창순─⑩강씨 ⑪필순─⑫방기분
①오인학(?~1870)이 구체적으로 무슨 학습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는데 줄을 탔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으며 그 외의 학습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해주를 본관으로 하지만 해주에서 이거를 한 것은 아니고 그 윗대에 대해서는 미상이나 아마도 정조대 무렵쯤에 비봉면 삼화리에 터를 잡고서 무업에 종사를 한 것 같다. 아마도 전통 사회에서는 이런 학습을 하는 이는 대대로 국악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다른 악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필순이 전해들은 것이라고 한다. ②김씨는 추정하건대 전통 사회에서는 계급내 결혼을 했다면 김씨도 무업에 종사한 것 같다.
③오상집(1866~1934); 모든 악기에 두루 능통했고 쌍줄을 탈 정도로 그야말로 전형적인 광대의 재주를 지닌 이었다고 하며 필순도 부친 상집한테 악기를 배웠다고 하며 나머지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④이도성(1865~?)은 무업에 종사했으며 각기 다른 집안에서 시집온 며느리들의 학습을 재학습을 시켰다고 한다. 이도성의 손에서 우러나온 학습이 손녀 딸(귀례․93세. 현재 생존하며 유명한 선학습꾼 이용우의 부인이었다)까지 미쳤다고 하며 세습무가 아니고 강신무이다.
⑤오창복(1883~1936)은 오상집의 장자로 피리, 해금을 하였다고 하며 오상집에게 학습을 하였다고 한다. 막내 계부인 필순과 동갑 나이이고 같이 어머니 젖을 먹고 큰 탓으로 학습도 비슷한 나이에 했다고 한다. 오창복의 장자 오용해(일명; 명선)는 피리, 해금, 장고, 발탈, 선학습을 한 이로 재주가 좋았으며 둘째 오돌근은 피리, 해금을 했고 삼녀는 귀례로 아직도 생존해 있으며 경기도 남부의 유명한 선학습꾼 고(故)이용우의 부인으로 옛 경기도 세습무들이 하는 굿의 산 증인이라고 볼 수가 있다. 사녀는 막음으로 소리 학습을 하기도 하였고 무녀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8년도에 74세로 폐병으로 작고를 했으며 오창복의 막내는 행방불명이다. 오창복의 아들 오용해의 딸은 오수연, 오경림, 오경분이 있는데 이들은 과거 여성 국극단에서 활동을 했으며 미모가 빼어나서 모델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오수연은 이남 일녀가 있는데 이들이 국악을 하는지는 조사된 적이 없다. ⑥신씨(1900~?)은 오창복의 처이고 부평의 유명한 세습무 집안인 신씨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강신무이다.
⑦오은귀(1888~1952)의 아명은 은복이며 부친인 오상집에게 피리, 해금, 대금, 장고 학습을 하였고 한국전쟁 때에 작고하였다. 오은귀의 장녀는 오용례인데 무업에 종사를 하지 않았다. 이녀 오광례는 생몰 연대 미상이다. ⑧강씨(?~?)는 오은귀의 초취처이고 재취처는 민씨로서 판교의 유명한 세습무 집안 무녀로서 학습이 매우 빼어나고 영험하기로는 제일이었다고 하며 역시 강신무이다.
⑨오창순(?~1952)의 아명은 창만이고 피리, 해금, 대금을 하였다. 그의 장자는 어렸을 적에 사망하였고 소생으로 오귀분, 오귀순이 있으나 이들은 국악에 종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창순의 여동생은 경기 민요 명창 고(故)전태용의 어머니였으며 40대 초반에 작고하였고 생존시 110세 정도라고 한다. ⑩곽씨(?~?)은 오창순의 처이고 강신무였다고 한다.
⑪ 오필순(앞의 내용 참조)의 장자는 오석근으로 생존시 83세이며 부친에게 18세에 피리 삼현과 시나위를 학습을 하였고 한국전쟁 때에 의용군으로 징집 당하여 생사 불명이다. 이남 오진근과 삼남 오수근은 생존해 있는데 아무런 학습을 하지 않은 이이며 1994년도에 작고를 하였다. 사녀 오진순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며 오남 오진수는 56세로 오필순의 자손 중 유일하게 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오씨 집안에서 전해내려 오는 사설과 오필순의 창법을 부를 줄 아는 유일한 이이다. 어렸을 적부터 보고 들은 것이 세습무들이 하는 것이라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가 있었는데 피리 삼현과 시나위도 배웠으며 목구성이 구성지고 애원성 있는 엇부침새는 부친의 것을 그대로 빼닮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육남 오학배 역시 무학습이고 막내딸은 포항에 거주하고 있으나 국악에 종사하지 않는다. ⑫방기분은 부평에서 난 방표준의 장녀로 오필순의 초취처이고 후취처는 이조관이며 무업에 종사했다.
•주요경력
화성군 비봉면 삼화리에서 십대를 세거한 전형적인 세습국악집안이다
호적에는 오필순으로 되어있지만 사람들은 필선이라 부르며 본인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꺼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필순은 조부 오인학(?~1870)이 쌍줄을 타고 각종 악기를 다루는 것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집안의 후손답게 악기는 물론 재담이나 장고, 앉은 말 학습 등 빼어난 재주를 지녔던 불세출의 명수였다고 한다. 열두살에 남사당을 따라서 만주에 가서 그야말로 동가숙서가식 하다가 고향으로 귀향을 하여 본디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준 재주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 보이기 시작을 하였다.
오필순의 피리 시나위와 삼현, 해금 삼현, 시나위는 부친 오상집에게 학습을 하고 또한 만주에서 보고 들은 것과 그리고 본인이 만든 가락을 바탕으로 짰으며 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앉은 말 만큼은 역시 집안에 전하여 내려오는 문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하며 이 문서는 현재(2002년) 무업에 종사하는 아들 진수가 소장하고 있다가 한 책은 분실하고 다른 한 책은 필사본으로 다른 이가 가져가서 되돌려 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오필순의 피리 시나위는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데 가락을 수성질로 연주하지 않으면서도 가끔씩 연주하는 시나위의 멋은 구성지고 한유한 가락이었다고 한다. 장유순의 가락이 매우 도드라지면서도 길게 뻗는 것이 특징이라면 오필순의 가락은 단오관, 육관청, 네가락 빗청, 얼빗청을 주로 구사하기도 하였다. 장단을 달아놓고서 가면 그 가락은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걱정이 하나 없는 가락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혀 튀김”, “ 목튀김”은 가히 일품이고 장유순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었다고 한다.
오필순은 악기만 잘 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갈고 닦은 공력이어야만 나오는 성주풀이를 앉아서 풀면 구성지기도 하려니와 그 청승맞은 목구성은 무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며 집굿이든 도당굿이든 뒷전에서 하는 “으뎅이” 놀음을 하거나 “맹인 타령”을 하면 그야말로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정도로 기가 막혔다고 한다. 경기도의 남부 지역 특히 화성 아래 지역은 거의가 새벽에 성주를 풀어내는데 여자가 장고의 궁편만 피면서 성주의 신격인 “황우양”을 주워섬기는 무가를 말하며 뒤이어서 집 짓는 순서를 온갖 재미있는 사설로 엮어서 하는데 남자가 할 경우에는 판패개 소리로 하지만 여자가 할 경우에는 이처럼 궁편만 치면서 무가를 구송하는 게 다르다.
오필순의 음향 자료로는 작고하기 일년 전에 양감면 고(故)오경환의 집에서 한 재수굿에서 조카 사위인 고(故)이용우와 같이 연주한 시나위 연주 음향 테이프가 남아 있다.
표-2. 오필순의 가계도
①오인학─┬─ ②김씨
├───┬───┬───┬───┐
③상집─┬─④이도성
┌───────┬──────┬─┴─────┐
⑤창복─⑥신씨 ⑦은귀─⑧곽씨 ⑨창순─⑩강씨 ⑪필순─⑫방기분
①오인학(?~1870)이 구체적으로 무슨 학습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는데 줄을 탔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으며 그 외의 학습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해주를 본관으로 하지만 해주에서 이거를 한 것은 아니고 그 윗대에 대해서는 미상이나 아마도 정조대 무렵쯤에 비봉면 삼화리에 터를 잡고서 무업에 종사를 한 것 같다. 아마도 전통 사회에서는 이런 학습을 하는 이는 대대로 국악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다른 악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필순이 전해들은 것이라고 한다. ②김씨는 추정하건대 전통 사회에서는 계급내 결혼을 했다면 김씨도 무업에 종사한 것 같다.
③오상집(1866~1934); 모든 악기에 두루 능통했고 쌍줄을 탈 정도로 그야말로 전형적인 광대의 재주를 지닌 이었다고 하며 필순도 부친 상집한테 악기를 배웠다고 하며 나머지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④이도성(1865~?)은 무업에 종사했으며 각기 다른 집안에서 시집온 며느리들의 학습을 재학습을 시켰다고 한다. 이도성의 손에서 우러나온 학습이 손녀 딸(귀례․93세. 현재 생존하며 유명한 선학습꾼 이용우의 부인이었다)까지 미쳤다고 하며 세습무가 아니고 강신무이다.
⑤오창복(1883~1936)은 오상집의 장자로 피리, 해금을 하였다고 하며 오상집에게 학습을 하였다고 한다. 막내 계부인 필순과 동갑 나이이고 같이 어머니 젖을 먹고 큰 탓으로 학습도 비슷한 나이에 했다고 한다. 오창복의 장자 오용해(일명; 명선)는 피리, 해금, 장고, 발탈, 선학습을 한 이로 재주가 좋았으며 둘째 오돌근은 피리, 해금을 했고 삼녀는 귀례로 아직도 생존해 있으며 경기도 남부의 유명한 선학습꾼 고(故)이용우의 부인으로 옛 경기도 세습무들이 하는 굿의 산 증인이라고 볼 수가 있다. 사녀는 막음으로 소리 학습을 하기도 하였고 무녀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8년도에 74세로 폐병으로 작고를 했으며 오창복의 막내는 행방불명이다. 오창복의 아들 오용해의 딸은 오수연, 오경림, 오경분이 있는데 이들은 과거 여성 국극단에서 활동을 했으며 미모가 빼어나서 모델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오수연은 이남 일녀가 있는데 이들이 국악을 하는지는 조사된 적이 없다. ⑥신씨(1900~?)은 오창복의 처이고 부평의 유명한 세습무 집안인 신씨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강신무이다.
⑦오은귀(1888~1952)의 아명은 은복이며 부친인 오상집에게 피리, 해금, 대금, 장고 학습을 하였고 한국전쟁 때에 작고하였다. 오은귀의 장녀는 오용례인데 무업에 종사를 하지 않았다. 이녀 오광례는 생몰 연대 미상이다. ⑧강씨(?~?)는 오은귀의 초취처이고 재취처는 민씨로서 판교의 유명한 세습무 집안 무녀로서 학습이 매우 빼어나고 영험하기로는 제일이었다고 하며 역시 강신무이다.
⑨오창순(?~1952)의 아명은 창만이고 피리, 해금, 대금을 하였다. 그의 장자는 어렸을 적에 사망하였고 소생으로 오귀분, 오귀순이 있으나 이들은 국악에 종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창순의 여동생은 경기 민요 명창 고(故)전태용의 어머니였으며 40대 초반에 작고하였고 생존시 110세 정도라고 한다. ⑩곽씨(?~?)은 오창순의 처이고 강신무였다고 한다.
⑪ 오필순(앞의 내용 참조)의 장자는 오석근으로 생존시 83세이며 부친에게 18세에 피리 삼현과 시나위를 학습을 하였고 한국전쟁 때에 의용군으로 징집 당하여 생사 불명이다. 이남 오진근과 삼남 오수근은 생존해 있는데 아무런 학습을 하지 않은 이이며 1994년도에 작고를 하였다. 사녀 오진순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며 오남 오진수는 56세로 오필순의 자손 중 유일하게 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오씨 집안에서 전해내려 오는 사설과 오필순의 창법을 부를 줄 아는 유일한 이이다. 어렸을 적부터 보고 들은 것이 세습무들이 하는 것이라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가 있었는데 피리 삼현과 시나위도 배웠으며 목구성이 구성지고 애원성 있는 엇부침새는 부친의 것을 그대로 빼닮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육남 오학배 역시 무학습이고 막내딸은 포항에 거주하고 있으나 국악에 종사하지 않는다. ⑫방기분은 부평에서 난 방표준의 장녀로 오필순의 초취처이고 후취처는 이조관이며 무업에 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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