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팔양(朴八陽, 1905~ ? ) 필명 김여수(金麗水)․여수(麗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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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1,804회 작성일 : 15-02-26본문
수원군 태장면 곡반정리 반남 박씨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박팔양은 그 시기에 김기진․나도향․박영희 등과 교유하였다. 고보 3학년 되던 해인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충격적 체험은 사회주의적 계급사상과 현실문제를 문학에 결부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이후 박팔양의 작품에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경성(京城)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정지용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발간하였다. 졸업 후 {조선일보} {중외일보(中外日報)}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이시기 그는 서울청년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19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신(神)의 주(酒)]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25년 8월 결성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1926년에 가담 카프의 초기 맹원으로 활동하며 초창기 계급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김여수(金麗水)라는 이름으로도 많은 시를 발표한 박팔양은 임화를 중심으로 한 단편 서사시 계열과는 달리 서정성 짙은 프롤레타리아 시를 주로 창작하였다. 이러한 서정성은 일찌기 ‘요람’을 만들기도 하였던 시적 감수성이기도 한데, 이러한 성격에서 그는 초기 계급 문단에 관여하기도 하고 1930년대 중반 예술주의적 동호인 그룹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는 등 다양한 문학적 편력을 전개했다.
그의 시는 일관된 서정성의 바탕 위에 두 가지 경향이 공존한다. 그 하나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노래한 경향시에서 시작하여 지적 성숙성을 더해 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전원을 예찬하는 자연시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는 건강한 사회참여가 정신적 바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1929년에는 카프 수원지부 주최 문학강연회에서 박영희․김기진․송영․박승극 등과 함께 「근대 문예사조에 대하여」라는 내용의 강연도 한 바 있다.
그 후 만주 신경에서 만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약 20년 걸친 시작활동을 정리하여 1940년 시집「여수시초」를 출간하였으며 구인회 동인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한 후 월북하였으나 구체적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직후 평북 신의주에서 평북신보사와 공산당 평북 도당 기관지인「바른말」사 등에서 편집국장을 맡았다. 1946년 조선문학예술동맹 중앙위원,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당보 『노동신문』의 전신인「정로」지의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노동신문』의 부주필을 지냈다.
아들 박문재가 16년간 장기수로 복역하고 출소하여 이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였다.
작품으로 시 「진달래」, 「저자에 가는 날」, 「데모」, 「승리의 봄」,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 『박팔양시집(朴八陽詩集)』, 소설 『오후 여섯 시』 등이 있다.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경성(京城)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정지용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발간하였다. 졸업 후 {조선일보} {중외일보(中外日報)}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이시기 그는 서울청년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19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신(神)의 주(酒)]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25년 8월 결성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1926년에 가담 카프의 초기 맹원으로 활동하며 초창기 계급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김여수(金麗水)라는 이름으로도 많은 시를 발표한 박팔양은 임화를 중심으로 한 단편 서사시 계열과는 달리 서정성 짙은 프롤레타리아 시를 주로 창작하였다. 이러한 서정성은 일찌기 ‘요람’을 만들기도 하였던 시적 감수성이기도 한데, 이러한 성격에서 그는 초기 계급 문단에 관여하기도 하고 1930년대 중반 예술주의적 동호인 그룹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는 등 다양한 문학적 편력을 전개했다.
그의 시는 일관된 서정성의 바탕 위에 두 가지 경향이 공존한다. 그 하나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노래한 경향시에서 시작하여 지적 성숙성을 더해 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전원을 예찬하는 자연시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는 건강한 사회참여가 정신적 바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1929년에는 카프 수원지부 주최 문학강연회에서 박영희․김기진․송영․박승극 등과 함께 「근대 문예사조에 대하여」라는 내용의 강연도 한 바 있다.
그 후 만주 신경에서 만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약 20년 걸친 시작활동을 정리하여 1940년 시집「여수시초」를 출간하였으며 구인회 동인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한 후 월북하였으나 구체적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직후 평북 신의주에서 평북신보사와 공산당 평북 도당 기관지인「바른말」사 등에서 편집국장을 맡았다. 1946년 조선문학예술동맹 중앙위원,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당보 『노동신문』의 전신인「정로」지의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노동신문』의 부주필을 지냈다.
아들 박문재가 16년간 장기수로 복역하고 출소하여 이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였다.
작품으로 시 「진달래」, 「저자에 가는 날」, 「데모」, 「승리의 봄」,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 『박팔양시집(朴八陽詩集)』, 소설 『오후 여섯 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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